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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박씨의 필살기 매뉴얼
    팔자에 없던 IT의 길 2020. 2. 22. 19:50

    게임 <KOF> 캐릭터 '이오리'의 필살기. 출처 : https://lucidity.co.kr/1072

    Daily Meeting을 가는 엘리베이터 안. J이사가 말했다.

     

    “자네 요즘 그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모자가 신체의 일부화되어 가는 것 같은데, 괜찮나..”

     

    원체 모자가 어울리지 않는 편이라, 모자라고는 꼴랑 하나 뿐이고 당연히 쓰기도 싫어한다.

    그런 내가 회사에 모자를 쓰고 나타나는 이유는 세가지로 좁혀진다.

     

    a. 지각 위기 (거의 없다.)

    b. 작정하고 야외에서 밤새 술 먹으러 가는 날 (중 잊지 않고 모자를 챙긴 날) (연 1-2회)

    c. 필살기 시전 (월 1회 이하)

     

    '필살기'로 말하자면 약 월 1회 빈도로 시전하는 업무 기술인데,

    요 몇 주간 3보 1배 마냥 3일에 1회 꼴로 시전하게 된 바,
    <팔자에 없던 IT의 길> 카테고리에 당도한 분들께 공유한다.

     


    1. 언제?

    내일 아침까지 끝내야 할 일은 터져 나가는데 전-혀 진도가 안 나갈 때

     

    @A사 / 대기업 본부 기획팀

    - 실적회의 자료 팀장님 리뷰가 내일 아침 10시. 
    - <이번 달 매출 개박살에 대한 변명 & 그럴듯한 보전책>을 짜내야 하는데, 답이 없을 때.
    - '이건 뭐 구라도 앞뒤가 맞아야 칠텐데..' 라는 생각이 든다면, 때가 온 것이다.

     

    @B사 / SI 프로젝트팀

    - 맡고 있는 화면 설계서 고객사 공유 데드라인이 내일 아침 09시.
    - 아직도 리뷰는 커녕 45/70 페이지를 채우고 있을 때.
    -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 전 자동 저장된 이전 버전이 43/70페이지라면, 때가 온 것이다.

    @C사 / 스타트업

    - 이 회사는 서비스 런칭이 1달 내로 다가오면 모든 업무의 진척도를 아침마다 체크한다.

    - 그 말인즉슨, 매일 아침마다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.
    - 벌써 23시인데 오늘 아침의 상태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? 때가 온 것이다.


    2. 왜?

     

    데드라인을 완-전 코 앞, 수시간 앞으로 만들면 모든 일이 해결된다.

    - 도저히 답이 안 나오던 부분에서 아이디어가 터져 나오며

    - 유난히 안 써지던 문장이 콸콸 쏟아져 나오며

    - 명제 간 논리가 간결한 형태로 바로 선다.

     

   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, (특히 약간 결이 다른 사람들은) 이런 반응이다.

     

    "스스로에 대한 기준이 높은 사람이구나."
    "박씨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서 일을 이렇게 까지도 하는구나."
    "모범샘 컴플렉스 같은 건가?"

     

    보통 이들에게 더 부연 설명을 하지는 않는데, 100% 틀린 말은 아니다.

    당연히 데드라인 준수 / 산출물의 퀄리티 등등에 걸린 내 자존심도 분명히 이 짓거리를 하는 이유 중 한가지다.

     

    하지만 그건 가장 후순위로,

    고백하건대 그 기저에 깔린 것은 작금의 사태가 폭망했을 때 외부의 반응에 대한 두려움이 9할이다.

     

    - 팀장님 / 본부장님의 짜증과 큰소리

    - 나름 같이 고생하는 고객사 담당자가 겪을 난처함

    - 복싱으로 다져진 대표님의 팔뚝과 부리부리한 눈

    난 이것들을 도저히 떳떳하게 견뎌낼 자신이 없다.

     


    3. 어떻게?

    *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의 출근 정책(09:30 출근)을 기준으로 타임라인을 작성한다.

     

    A. 전일 22시 - 23시 : GG치고 퇴근

     

    - 당장 끝내야 할 일을 리스트 업하고 퇴근한다.

       : 1차. 데드라인 시간 순 / 2차. 중요도로 리스트업 해본다. (중요도는 두 번째 인 점을 명심하자.)

       : 제법 큰 꼭지가 3개 이상인가? 미안하지만 어차피 못 한다. 그래도 다 하겠다고 마음먹고 집에 가자.

       : 당신의 능력이 없어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. 불행한 사고처럼 그냥 일어난 일이니, 너무 자책하지 말 것.

     

    - 문을 닫는 건물이라면 출입카드를 미리 챙긴다.

      : 업무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분이라면 상관없다.
        (* 참고로 나는 오랫동안 내가 그런 것으로 착각하고 살았다.)

      : 새벽에 들어갈 수 없는 건물이라면 인근 24시간 카페와, 대중교통이 없는 새벽에 그곳에 갈 방법을 생각해둔다.

     

    -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마실 카페인 음료(핫식스 / 레드불)를 사둔다.

      : 정신줄 놓고 있다 자기 전에 마시는 일이 없도록 한다.

        (* 나는 자기 전 담배에 곁들여 마셔버린 경험이 있다.)

     

     

    B. 전일 23시 - 00시 : 기 모으기

     

    - 귀가 후 따뜻한 물로 샤워한다.
      : 유튜브로 시간 낭비하지 않도록 하자.

     

    - 목표 기상시간(04시 권장)에 알람을 1분 간격으로 5개 맞춰둔다.

      : 03시 59분 알람부터 시작하는 것이 또 팁이라면 팁이다.

     

    - 잠들기 전 생각은 기도 종류가 좋다.

      : 예시 주제 1) 본부장님이 내일 갑자기 조찬 일정이 생기게 해주세요.

      : 예시 주제 2) 고객사 카운터 파트가 오늘 휴가쓰게 해주세요.

      : 예시 주제 3) 투자사 담당자가 별 것 아닌 일로 대표님을 급히 호출하게 해주세요.

     

     

    C. 00시 - 04시 : 숙면

     

    -  잘 잔다. 나는 꿈도 꾸지 않는 편이다.

      : 예전에 모셨던 팀장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종종 하셨다.

      '(23:50 쯤 짐을 싸며) 아.. A건이 있구나...(한숨) 그건 내가 자면서 생각 좀 해볼게...'

        업력이 낮은 나는 아직 익히지 못한 기술이다.

     

     

    D. 당일 04시 - 05시 : 필살기 가동

     

    - 일어난다.

      : 아마 누군가 깨워줄 수 없다면, 이미 30분쯤 지나 있을 가능성이 높다.
      : 좌절하지 말자. 그 부분도 이 타임라인의 계산에 포함되어 있다.

     

    - 세수만 하고, 면도와 머리 감기는 생략한다. 모자를 쓰고 가시길.

      : 당연한 소리지만 이게 불가한 회사에서는 금물이다. 
      : 역풍 맞기 싫으면 시간을 따로 확보하자.

     

    - 퇴근 시 사둔 카페인 음료를 마시자.

     

     

    D. 당일 05시 - 06시 : 출근 완료

     

    - 너-무 서두르지 않으며 출근한다. 
      : 출근 전 담배 피우기, 짧은 유튜브 시청처럼 평소와 같은 사소한 시간 낭비를 해도 괜찮다.

      : 이 구간부터 추가 카페인 음료는 적당히 하는 것이 좋다. 
        카페인이 과도해지면 일해야 할 타이밍에 춤을 추고 싶을 것이다.

     

    - 회사에 왔는데 누가 이미 있다면?

      : 설령 그와 다소 어색한 사이더라도, 아주 작게 서로를 위로 하자.

     

    - 도착 후 깨작깨작 일한다. 보통 첫 30분-1시간 구간에는 잘 안 나온다.

      : 이 구간에는 뭔가 나오더라도, 쓰지 못하거나 처음부터 손봐야 할 공산이 높다.

      : 그래도 죄책감을 덜기 위해 열심히 해보자.

     

     

    E. 06시 - 09시 : 약속의 6시

     

    - 이때부터는 시간을 잘라서 투자한다.

      : 단순하게 남은 시간 / 각 과업으로 시간을 나눈다. (각 과업의 Weight에 기반하여 나누지 않는게 가장 중요)

      : 다음 과업으로 넘어가야 할 시간을 생각하며 일을 한다.
      : 그러나 이 짧은 호흡의 계획도 항상 어그러져 조금씩 시간을 넘기게 되는데, 어쩔 수 없다.

     

    - 당신은 천재가 되고, 많은 것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온다. 만세!

      : 스스로를 칭찬하자. '박씨.. 넌 천재야.' 

     

    - 뒤돌아 보지 않고 앞으로만 간다.

      : 정말 중요한 것(ex. 논리의 Base가 되는 숫자 / 각 장표의 Headline etc.)을 빼고는 더블체크 하지 말자.
      : 아직 틀린 것이 잘 안 보이는 구간으로, 검수는 효율이 떨어지는 행동이다.

     

    - 많은 사람들이 출근하기 시작한다.

       : 누가 나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다크포스를 뿜어 낸다.

     

     

    F. 09시 - 09시 30분 : Finish

     

    - 비로소 최종 점검 구간. '낯설게 보기' 방법을 사용!

       : 입력할 때 본 View와 다른 View로 점검한다.
          예시 1 워드 문서)  화면말고 출력해서 본다. 
          예시 2 프리젠테이션 문서) <슬라이드 쇼> 모드로 그냥 툭툭 돌려보자.
          예시 3 스프레드시트 문서) '참조하는 셀', '참조되는 셀'로 로직의 흐름을 체크하자.

       : 다른 이에게 부탁하는 것도 좋은 방법.
       : 사실 심각한 오탈자만 없어도 절반 이상은 간다.

     


    4. 유의사항

     

    A. 필살기는 '확률 Base Skill'이다.

     

    - 다시 말해 일정 확률로 발동이 안 걸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.

    가끔 이런 일이 일어난다. 출처 : 웹툰 <질풍기획> 1화

    - 따라서 Contingency Plan을 세워두는게 좋다.

      : 만일 눈을 떴는데 08시라면...
        예시1 ) 중간 논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인 장표 4~6페이지를 폭파해야지.

        예시2 ) 남산에 가서 나무를 해서 뗏목을 만든 다음, 인천 → 산둥반도로 밀항을 시도해야지.

     

     

    B. 산출물의 퀄리티는 어느 정도 타협해야 한다.

     

    - 애초에 필살기의 최상위 목표가 '늦지 않기'이다.

      : 경험상 보았을 때, 목표 퀄리티를 100으로 가정 시 필살기를 시전하면 70-80에서 끊어진다.

      : 그렇다고 밤을 꼴딱 새면 그 퀄리티가 100이 되었을 것 같은가? 잘 생각해보자.

     

     

    C. 자주 사용할 시 건강은 보장할 수 없다.

     

    - 이 정도로 픽 쓰러지지는 않는다. 그러나 없던 잔병이 찾아올 수 있다.

      : 예컨대 가벼운 감기몸살, 급체 등이 생길 수 있다.

      : 2019년 의료비 0원을 기록한 나도 최근 잦은 필살기로 인해 얼마 전 급체/식중독으로 응급실을 찾았다.


     

    이 글을 구상한 날도 다음날 필살기 써야 할 판에 처했다.

    미팅을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엘리베이터 안, J이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.

     

    박씨 : 이사님. 예고 하나 드리자면 내일 저 면도 안하고 모자 쓰고 올거 같아요.
    J이사 : 어머, 오늘은 면도한거야?

    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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